본문 바로가기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어서

2021.3.17.18.19

728x90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와 운동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한 달 남짓 지난 우리, 피곤한지 목소리가 다운되어있다. 최근 이직을 준비하는 그녀였기에 피곤함이 몰렸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평소처럼 날 예뻐해주지 않는 느낌에 조금은 서운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바쁘고 피곤한 그녀에게 보챌 수는 없었다. 

 

'어제 오늘 우울했는데, 친구 만나고 나니까 좀 괜찮아졌어.'

'아 정말..?'

'응. 근데 좀 괜찮아'

'아...가끔씩 찾아오는 우울함인거야..?'

'응 맞아~ 가만히 놔두면 돼'

 

절대로 가만히 놔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난 지 한 달 남짓밖에 되지않은 우리, 최근 우리의 연락은 간결해졌고 활기를 띄지 못했다. 그게 다 우리가 둘 다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에는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치부했었다.

 

'무슨 일있는지 물어봐도 돼?'

'...'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공허해. 오빠는 멀리있으면 진짜 멀리 있는것같아'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찾고있었다. 나는 이런 저런 상황에 상대방의 기분을 풀어주는 법을 잘 모른다 여전히. 28년이면 꽤 많은 경험을 했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의 나는 항상 어찌해야할 줄을 모른다. 

 

'미안해'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냐.괜찮아'

'많이 힘들어..?'

'적당히 힘들어. 이제 자자'

 

하나도 괜찮지 않다. 내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보고싶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어리광부리는것같아서 말을 못했네. 우울한것도 모르고 괜히 섭섭할뻔 한게 더 미안하다. 진짜 바보같이 이럴 때 웃게하는 방법도 위로하는 방법도 모르고 그냥 잘못하기만하는것 같아. 적당히 힘들다는 그 말이 더 마음 아프더라 내가 있어도 여전히 힘들다는 것 같아서. 울고있을 때 옆에 가지도 못해서. 노력하고 멋있는 잘챙겨주는 그런 사람 된다던 게 참 부끄럽다. 많이 걱정 돼 진심으로.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 같이 있을때도 없을때도 너 힘들게해서 미안해. 더 많이 노력할게 더 많이 조심하고 아낄게. 미안해'

 

장문의 카톡을 보내고 한 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그녀가 되게 외로움을 많이 타는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어제 퇴근 후 아팠던 허리가 더 심하게 아파왔다. 급하게 휴가를 쓰고 병원에 갔다. 휴가를 추가로 사용하고 그녀에게 가기로 했다. 어제의 우울하고 힘든 마음을 표현했던 그녀가 오늘은 아픈 나를 걱정해준다. 못난 사람이 바로 나다.

 

퇴근 후 맞이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렇게 평소처럼 웃으며 장난도 걸고 농담도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역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었다.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너무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주변의 아울렛을 둘러보고 난 뒤 집으로 향했다. 

 

이제는 당연해진 그녀의 집에 나의 옷을 건네받고 취침 준비를 한다. 맨 얼굴로 나온 그녀도 아름답다. 사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매끄러운 그녀의 얼굴이 너무 예쁘다. 보드라운 피부가 나를 유혹해서 자꾸만 얼굴을 감싸고싶어진다.

 

'사랑해'

 

그런 그녀를 보며 자연스럽게 입밖으로 나온 말. 그녀가 미소를 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 맘에 걸리지만 강요할 수도 없는 법. 그녀가 어제 나에게 한 말이 다시 마음에 걸린다. 침대에 누워 서로를 바라본다.

 

'오빠는 눈치가 좀 없는 것 같아.'

 

서운함을 말해주려는 그녀의 말에 장난스러우면서도 미안함을 담은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서운한 표정하면 내가 어떻게 말해'

 

내 표정은 그게 아닌데...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진지하게 들을게 말해줘'

'...'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난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마음으로, 반성할거고 얼마든지 무슨이야기든 내가 미안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그녀를 같이 바라봤다. 한참동안 앉아서 말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가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해서 눈물을 흘린다.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 바라보는 오빠를 보니까 씁쓸하네.'

'...'

'나는 많이 노력하는데 항상 내가 대화를 주도하고, 오빠는 나를 진짜로 걱정해주는 것 같지 않아. 내가 밥을 안먹었어도 그냥 정말로 신경 안쓰이는것 같아. 나는 사랑받고싶어'

'미안해'

 

진심으로 미안했다. 사실은 이전에도 느꼈던 것. 누군가에게는 들어봤던 이야기. 휴대폰을 통해서 대화를 할 때에 재치있게 다음주제로 넘어가는 것을 잘 못한다. 내가 리드해서 이 대화방을 재미나게 만드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 그런 것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날 위해 많이 노력해준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표현을 잘 못한다.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휴대폰속에서는 바로 옆에서 챙겨주는 것만큼의 노력을 잘 못한다. 요즘은 챙겨줄 수 있는 수단도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걱정하는 말 한마디 정도로 넘어가버린 나의 지난 대화들이 생각나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사실 그녀와 나는 겨우 한 달을 조금 더 연락을하고 만나고있다. 아직 서로가 무슨 표정을 하고있는지, 내 표정이 지금 무슨 마음과 생각을 하고 짓고 있는건지도 잘 모르는 우리이다. 그런 우리에게 당연히 내 마음을 알겠지 라는 생각은 사치인데, 나의 잘못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너무 좋아서,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확실해서 나는 그렇게 다른 노력들을 당연히 행하고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어쩌면 그녀를 위한 좋은 선물들을 골랐을 게 아니라 그녀의 일상생활 하나하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어야했는데.

 

그렇게 그녀를 재우고 지난 대화들을 살펴보았다. 재미없는 대화방이 되기 직전 항상 버둥대고있는 그녀가 보였다. 게다가 밥을 안먹어서 배고프다는 그녀의 말을 그냥 지나친 대화도 발견했다. 나는 대체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해도 되는건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고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온건지.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차마 자고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줄 수 없이 잠에들었다.

 

출근을 위해 일찍 일어난 그녀와 그녀를 바라보는 나. 평소같으면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를 귀찮게 했을테지만,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다가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나를 위로라도 하는 듯 그녀가 내 손을 잡아주고 출근을 했다.

 

'아침엔 내가 꽁해있던것처럼 느꼇을까봐 걱정이네 미안해서 어떻게 다가가야할 지 잘 모르겠더라. 어제는 우리 최근에 했던 대화들 다 읽어보면서 반성 많이 했어. 내가 정말 많이 노력해야겠어. 나 만나줘서 고마워. 예쁜데 노력도 해줘서 고마워'

 

'지금이라도 느껴서 다행이야.'

 

그녀의 그 말이 얼마나 나를 안심시킨지 모를것이다. 안심에서 멈추지 않고 항상 조심해야한다. 우리는 아직 너무도 서로를 모르기에. 그리고 마음은 가지고있는것이아닌 표현하는 것이기에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녀를 위해 계획한대로 냉장고를 좀 채워주기로했다. 몸에 나쁘지 않으면서 맛도 괜찮고 귀찮지 않은 녀석들을 찾다보니 생각보다 많이 고를 수 없었다. 그렇게 장을 보고나니 꽃집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은 이전의 날이 좋은 그 날에도 꽃을 선물했었다. 그리고 최근에 그녀를 위한 선물을 할 때에도 꽃을 줬다. 이번엔 이 꽃 한송이가 그녀의 마음을 조금 더 풀어줄 수 있길 바란다.

 

나는 사실 꽃집에 들어가는걸 어색해하는 사내아이이다. 그래서 이전의 연애를 할 때에도 꽃을 산 기억은 거의 없던것 같다. 게다가 꽃을 들고 돌아다닐 때 나의 이미지랑 맞지 않는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어서 부끄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웃어준다면야 얼마든지 사주고 싶다. 예쁜 화병을 사고 싶어했던 그녀를 위해 하나 구매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없는 내눈에도 성에 차는 게 없어서 아쉽게도 화병은 못샀다.

 

그렇게 그녀를 위한 장미를 그녀의 침대 옆에 고이 모셔두고, 그녀를 위한 음식들을 채워둔다. 막상 채우고나니 여전히 허전한 느낌이 들어 아쉽지만 유통기한을 생각해서 점차 다양하게 채워보기로 한다. 

 

그녀가 없는 그녀의 집에서 홀로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햇살을 느끼며 그녀를 위해 편지를 써내려간다. 길진 않아도 처음으로 직접 쓴 편지를 전하는 것이다. 글씨가 예쁘지 않아서 나름대로 더 공들여보지만 오히려 느리게 쓴 글씨가 더 예뻐보이지 않아서 적당한 속도로 편지를 채워간다. 

 

편지를 숨기려다 발견한 그녀의 과거 흔적이 마음에 턱 앉혀버린다. 대단한 구석에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위치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의 그녀를 만날 수 있는것이지만, 나는 요즘스럽지 못한 사람인것 같다. 풍부한 상상력을 자제하느라, 뭔지 모를 서운한 감정을 애써 모른척 하느라 힘겨웠다. 당장 한달 내내 그녀에게 잘못한 놈이 무슨 권한으로 서운한 티를 낼 수 있겠는가. 모른척 해보자. 안 될 것 같다 아마 조금은 티가 날 수도.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 미리 알아본 파스타와 피자가 맛있는 집으로 향한다. 자신있게 내 손을 잡아준 그녀가 사랑스럽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긴장하며 그녀가 평소같은 미소를 지어주길 기대하며 다시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럽게. 그렇게 내가 힘들게 한 그녀와 가까워진다. 

 

처음으로 같이 쇼핑을 하게 되었다. 파란색의 블레이저가 잘 어울려서 그녀에게 선물했다. 사실 그것뿐 아니라 뭘 입어도 빛이 난다. 패완얼은 이런거지. 나는 왜 열심히 옷을 사는가. 난 왜 비싼 옷을 사는가. 그 돈을 모아서 얼굴을 고쳐야지.

 

선물 한 옷과 다른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이직준비를 위해 옆에서 응원해주고, 노래도 듣고 잠들기 전 스트레칭도 한다. 이렇게 일상을 함께하는 게 너무 감사하다. 이런 일상에 그녀가 나와 함께 해준다는게 너무 감사한 일이라는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어제 밤 잠에들지 못하며 잠시나마 그녀가 나때문에 힘들어서 떠나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에게 과분한 사람인데. 잘 때 끙끙거렸다는 나를 보고 토닥여줬다는 그녀의 말에 오늘 아침 미안함에 눈물이 나더라. 이 사람은 그 와중에도 나를 또 챙겨줬구나. 항상 반성하자.

 

불을 끄고, 쉽게 다갈 수 없었던 어제와는 다른 그녀가 따뜻하게 내게 안긴다. 그녀의 눈, 코, 입, 목, 손, 발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가 않다. 그렇게 조금 더 그녀에게 집중하며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잠에 든다. 

 

늦잠을 자버린 그녀와 그런 그녀 옆에서 그녀를 꼭 안고있는 나. 얼굴은 나만 붓는것같다. 오히려 늦으니 여유가 생겨 아침시간을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나를 더 많이 심어줘야지 계속 안고있을 수 있게 

728x90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아하는 이유  (0) 2021.03.29
평범하고 특별한 하루  (2) 2021.03.29
그래도 기대돼  (0) 2021.03.15
센스있는 남자친구  (0) 2021.03.09
집에 가고 싶어  (0) 2021.03.05